Ⅳ. 열국 쟁웅-을파소의 업적
1. 고구려 왕실의 정치 분쟁
기원후 179년 신대왕이 죽고 고국천왕이 즉위한 후, 왕후 우씨(척나우소의 딸)가 뛰어난 미모로 왕의 총애를 받게 된 것이다. 이로 인해 왕후의 친척인 어비류는 '팔치'가 되고, 좌가려는 '발치'가 되어 정권을 마음대로 휘두른 것이다. 이들의 자제들은 교만하고 난폭하여 남의 아내와 딸을 빼앗아 첩으로 삼고, 아들과 조카들을 잡아다 종으로 삼으며, 좋은 밭과 집을 강탈하여 백성들의 원망이 컸던 것이다.
왕이 이를 알고 처벌하려 하자 좌가려 등이 연나부에서 반란을 일으킨 것이다. 왕은 기내의 군사와 말을 동원하여 이를 평정하고, 왕후 친족의 정치 간여를 징계한 것이다. 이후 4부대신에게 조서를 내려 덕이 있는 인재를 천거하라 명했고, 4부는 의논하여 동부의 안류를 추천한 것이다.
2. 을파소의 등용
안류는 자신의 능력이 부족하다며 서압록곡의 처사 을파소를 천거했다. 을파소는 유류왕 때의 대신 을소의 후손으로, 고금의 치란에 밝고 민간의 이해를 잘 알며 학식이 풍부했으나 초야에 묻혀 살았던 인물인 것이다.
고국천왕은 을파소를 스승의 예우로 대우하며 중외대부를 삼고 '일치'의 작위를 더했다. 을파소는 처음에는 사양했으나, 왕이 그를 '신가'로 삼아 모든 관리의 위에 두자 국정에 전념한 것이다. 신하들의 시기와 비난이 있었으나 왕은 을파소를 더욱 신임했고, 을파소는 상벌을 신중히 하고 정령을 밝혀 나라를 잘 다스려 고구려 900년 역사에서 가장 태평한 시대를 이룩한 것이다.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의 오류에 대해 설명하면 다음과 같은 것이다.
본기에는 "고국천왕(혹은 국양이라 함)의 이름은 남무(혹은 이이모)로, 신대왕 백고의 둘째 아들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는 것이다. 또한 "백고가 죽자 나라 사람들이 맏아들 발기는 불초하다고 하여, 함께 이이모를 세워서 왕을 삼았는데, 한의 헌제 건안 초에 발기는 자기가 형으로서 왕위에 오르지 못한 것을 원망하고 소노가와 함께 각각 딸린 민호 3만여 명을 거느리고 공손강에게로 가서 항복하고 돌아와 비류수 상류에서 살았다"고 한 것이다.
그러나 이는 김부식이 《삼국지》 고구려전의 본문을 그대로 옮겨 쓴 것으로, 중대한 오류를 포함하고 있는 것이다. 발기는 곧 산상왕 본기 중의 발기요, 이이모는 곧 산상왕 연우인데, 《삼국지》의 작자가 발기와 연우 두 사람을 신대왕의 아들로 잘못 전한 것을 김부식이 경솔하게 믿은 것이다. 이로 인해 고국천왕 남무를 이이모라 하고, 남무를 발기의 아우라고 하는 첫 번째 오류가 발생한 것이다.
두 번째 오류는 시기의 착오이다. 《삼국지》 공손도전에 따르면, 공손강의 아버지 공손도가 한의 헌제 초평 원년(기원후 190년)에 요동태수가 되어 건안 9년(기원후 204년)에 죽고, 공손강이 뒤를 이은 것이다. 한의 헌제 초평 원년은 고국천왕 12년에 해당하니, 고국천왕 즉위 초에는 공손강은 물론 그 아버지 공손도도 아직 요동태수가 되기 전인 것이다. 그럼에도 김부식은 이를 고국천왕 즉위 원년의 일로 잘못 기록한 것이다.
더구나 앞서 신대왕 5년에 "공손도를 도와 부산의 적을 쳤다"고 한 기록과 함께 보면, 김부식이 공손도가 어느 시기의 인물인지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음이 드러나는 것이다. 이는 매우 기이한 오류라 할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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